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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한 세상·추악한 인간 내면 다룬 누아르 걸작

검은 색을 뜻하는 프랑스어 ‘누아르(Noir)’는 암울한 분위기가 가득한 영화들을 일컫는다. ‘필름 누아르’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하드보일드’는 1차 세계대전 후, 인류에 닥쳐온 절망에서 출발한다. 최고의 이념으로 여겨졌던 자본주의의 모순이 대공황이라는 파멸적 위기로 나타나면서 희망보다는 인간에 대한 불신, 미래에 대한 절망이 인류의 심리 안에 자리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조류에 걸맞은 범죄 영화들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면서 주인공의 캐릭터들이 하드보일드라는 장르를 전형화하기 시작했다.       하드 보일드의 키워드는 ‘비정’과 ‘냉혹’이다. 하드보일드 영화에 등장하는 탐정이나 형사들은 인정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정의감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움직인다. 하나같이 무뚝뚝하고 거칠어, 로맨틱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말보다 주먹과 피스톨이 앞선다.   천재 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1974년 발표한 ‘차이나타운(Chinatown)’은 하드보일드의 한 획을 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가 시작되고부터 15분 안에 관객을 사로잡지 못하면 실패한다’는 시간 배분 원칙. 그리고 ‘누군가가 무엇을 간절히 이루려 하나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줄거리 구성의 원칙. 그 모든 게 적절히 녹아있으면서 기-승-전-결 구도가 완벽하게 짜임새를 이루고 있는 이 영화의 스토리는 많은 영화학과에서 각본 교재로 널리 쓰이고 있을 만큼 탁월했다.     돈만 있으면 법은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치외법권적 비리와 불륜에 얽힌 음모에 관한 스토리다. 실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한 이 영화는 정의와 권선징악에 익숙해 있던 관객들에게 작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영화는 1930년대 로스앤젤레스의 댐 건설을 둘러 썬 이익집단 간의 대립과 암투를 배경으로 한다. 댐 건설로 엄청난 이익을 노리는 건설업자들과 댐이 들어서면 생업에 지장을 받게 될  농축업 종사자들 사이의 집단 갈등 속에서 전직 형사로 사설탐정소를 운영하는 제이크 기티스(잭 니컬슨)는 LA수도국 국장 홀리스 멀레이의 아내로부터 남편의 불륜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그러나 멀레이의 진짜 아내 에블린 멀레이(페이 더너웨이)가 나타난다. 얼마 안 가 홀리스가 의문사를 당하면서 그의 파트너였던 백만장자 노아 크로스(존 휴스턴)의 존재가 표면에 떠오른다. 제이크는 정계 거물인 크로스가 에블린의 아버지이며 사건의 배후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패와 악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가운데 오랫동안 은폐되었던 거대한 음모가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한다.     LA수도국장 멀레이, 그의 부인 에벌린, 멀레이의 파트너이자 에벌린의 양아버지인 크로스, 멀레이의 연인으로 알려진 캐서린, 이렇게 다섯 명의 인간관계가 미스터리하게 전개된다.   이 영화는 “Forget it Jake, it’s Chinatown”이라는 유명한 대사를 남겼다. 영화 내내 차이나타운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지만 차이나타운은 법과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혼란스러운 동네, 돈만 있으면 법은 문제가 되지 않는 그들만의 ‘안전지대’를 상징한다.     폴란스키의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 ‘차이나타운’은 관객을 즐겁게 하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의 씁쓸한 뒷맛은 악인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충격적 결말에서 기인한다. 폴란스키는 인간 사회의 곳곳에서 돈과 권력을 이용, 법을 입맛대로 주무르는 권력자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고 우리는 그러한 체제에 너무나 잘 길들어져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파헤친다. 폴란스키 감독은 영화의 배경지인 LA라는 도시, 더 나아가 미국 사회의 곳곳에서 재력을 이용, 법을 입맛대로 주무르는 권력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제작 과정에서 폴란스키는 각본을 쓴 로버트 타운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특히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하자는 타운과 반대로, 폴란스키는 비극적 결말을 고집했다. 에블린이 죽지 않으면 영화는 용두사미가 된다고 고집한 폴란스키에게 결국 타운이 양보했다. 결과적으론 폴란스키의 말이 맞은 셈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플롯 속에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악의 법칙을 힘있게 연기해낸 것은 노아 크로스 역을 맡은 존 휴스턴이다. 영화의 핵심 주제인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불신은 그의 연기로부터 견인된다. 그가 연기한 노아 크로스는 영화사상 최고 악역 캐릭터 중 하나로 꼽힌다.   휴스턴은 걸작 웨스턴과 필름 누아르를 여러 편 감독한 할리우드의 거장이다. 필름 누아르의 명감독이 다른 감독의 필름 누아르에 출연했다는 것부터 눈길을 끈다. 돈과 권력을 양손에 쥐었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노회하고 냉혹한 악인을 소름돋게 연기해냈다.  극중에서 그는 주인공 제이크(잭 니컬슨)에게 “내 딸과 잤나”라고 묻는다. 당시 휴스턴의 딸 안젤리나 휴스턴이 실제 니컬슨과 연애하던 시절이었기에, 의도하지 않은 명장면이 돼버렸다.     ‘차이나타운’은 원래 3부작으로 제작될 요량이었다. 제2편은 1990년 잭 니컬슨이 감독한 ‘투 제이크스(Two Jakes)’. 그러나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을 정도다. 결국 3부 제작 계획도 취소됐다. 1988년엔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혼합한 영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가 제작됐는데, ‘차이나타운’의 스토리 라인을 군데군데 차용했다. 이 영화에 대해선 ‘차이나타운’을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의 이해도가 크게 엇갈린다. 여기에 나오는 유명대사는 “Forget it Eddie, it’s Toontown”. 만화동산과 차이나타운의 이 절묘한 대비 앞에서 관객들은 포복절도한다.       폴란스키는 이 영화에 단역으로 직접 출연한다. 저수지에서 제이크의 코를 나이프로 자르는 깡패를 맡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제작진 소개 자막엔 ‘나이프를 든 남자’ 역으로 그의 이름이 나온다. 김정 영화평론가누아르 추악 하드보일드 영화 필름 누아르 폴란스키 감독

2024-06-19

50년 지나도 맴도는 할리우드의 깊은 상흔

60년대 말 ‘The Fearless Vampire Killers’, ‘Valley of the Dolls’ 등의 B무비로 잘 알려진 할리우드 스타 샤론 테이트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두 번째 아내로 당시 유망했던 여배우들 중 한 명으로 꼽혔다.     1969년 8월 9일은 테이트가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지상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로 세상에 알려지는 날이다. 26세의 떠오르는 별 테이트를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여배우로 만들어 준 인물은 불행하게도 희대의 살인마 찰스 맨슨이었다. 임신 만삭의 테이트는 행복의 절정에서 잔혹한 살인사건의 희생자가 됐다.     베벌리 힐스 인근의 고급 주택가 베네딕트 캐년 10050 Cielo Drive에서 3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가 테이트와 함께 살해된다. 맨슨패밀리 일당은 태아만이라도 살려달라는 그녀의 애원을 무시하고 끔찍한 범행을 저질러 공분을 샀다. 경찰은 이 사건을 ‘테이트 살인사건(Tate murders)'으로 명명한다.     맨슨패밀리의 일원으로, 2건의 1급 살인과 1건의 살인 공모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레슬리 밴 휴튼(73세)이 지난 11일 50년 만에 석방됐다. 휴튼은 1969년 8월 8일부터 10일까지 맨슨의 살해 명령을 수행했다. ‘홈커밍 퀸’으로 미모가 출중했던 휴튼은 당시 19세의 어린 나이였다. 그녀는 가석방 심의에서 맨슨을 교주로 믿고 그의 명령을 따랐지만 지금은 살인사건에 연루되었던 사실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희생될 뻔했던 캔디스버겐, 도리스 데이   컬트 리더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은 폴란스키의 집에서의 집단 살인을 수행한 후, 유명 여배우이며 지인이었던 캔디스버겐을 추적했다. 버겐의 남자 친구이며 레코딩 프로듀서 테디 멜처는 불과 2달 전 폴란스키-테이트 부부에게 베네딕트 캐년 집을 임대해주고 말리부의 해안가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뮤지션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기를 열망했던 맨슨은 버겐과 멜처가 베데딕트캐년 집에 살고 있을 때, 이곳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버겐의 소개로 멜처를 알게 된 맨슨은 그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버겐은 맨슨이 프랭크 시나트라에 버금가는 뮤지션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러나 멜처가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그에 대한 보복을 마음에 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멜처는 가수 겸 배우로 인기 절정의 TV시트콤 ‘도리스 데이쇼’의 주연 배우 도리스 데이의 아들이었다. 아들 집을 자주 방문했던 데이는 사건 이후 충격에 휩싸였고 이후 맨슨 추종자들의 협박으로 우울증과 양극성 장애 증세에 시달렸다.     테이트의 죽음은 멜처에 대한 보복이 동기였기 때문에 더욱 더 억울한 죽음으로 받아들여졌다. 만약 멜처가 집을 옮기지 않았다면 멜처, 데이, 버겐에게도 불행한 일이 닥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건 당시 런던에 가 있던 폴란스키 감독은 서류 미비로 미국행을 연기해야 했다. 영국 당국이 폴란스키의 미국행을 허락했다면 그 역시 아내와 함께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테이트는 이소룡에게 무술을 배우고 있었는데, 폴란스키는 이소룡을 살인범으로 오해했다고 후일 밝혔다.     살인사건 이후 도시 전체가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프랭크 시나트라, 토니 베넷 등의 할리우드 스타들은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 것이라는 우려 속에 한동안 은신처로 피신해 살아야 했다.     샤론 테이트의 사망 주기 50주년인 2019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발표한다. 마고 로비가 테이트 역을 맡았으며, 영화는 호평 속에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스타가 되길 원했던 찰스 맨슨   맨슨은 히피 문화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가장 유명한 살인마로 기억된다. 어린 시절 가톨릭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심한 구타와 체벌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 절도를 저지르다 소년원으로 보내진다. 이후 맨슨은 강도, 강간 등의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를 빈번히 드나들었다. 교도소 내에서 다른 수감자들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했고 그 또한 다른 수감자들을 성적 학대했다.     맨슨은 좌절한 음악가였다. 그는 교도소에서 기타를 처음 배웠다. 열렬한 비틀즈의 팬이던 그는 비치보이스의 데니스 윌슨, 닐 영과 교제를 나누었다는 설이 있다. 맨슨의 기타 연주는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그를 야심찬 싱어송라이터로 기억하고 있는 증언들이 여럿 나왔다.     1967년 34세의 나이로 출소한 맨슨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히피 문화에 심취했고 강한 카리스마로 맨슨패밀리의 ‘교주’로 떠올랐다. 키가 5피트 2인치에 불과했던 맨슨에게는 사람을 세뇌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악명 높았던 맨슨이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후에도 일부 젊은이들이 그를 추종하는 기현상이 이어졌다. 그는 요한계시록과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을 자주 인용했다. 히피들의 반문화적 반항 의식이 맨슨패밀리를 지배하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맨슨은 13번의 가석방을 신청했으나 모두 기각되었고 2014년 26세의 젊은 여성과 옥중 결혼식을 올렸다. 맨슨은 2017년 감옥에서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김정 영화평론가할리우드 상흔 테이트 살인사건 할리우드 스타 폴란스키 감독

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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